오늘 댓글을 읽다가 생각해볼 내용이 있어 캡처해 올려본다. 물론 시대의 흐름과는 다 르기에 추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감대를 얻지못한다는 뜻이다. 시대는 역사가 되 고 역사는 현재가 된다. 그러니 역사는 시대인식을 낳는다. 오늘날의 시대인식은 인권 이란 가치가 널리 확산됐다. 허나 위의 사람에겐 인권의식이 없다. 왜 그럴까? 피흘려 가며 힘겹게 얻지 못했다. 그냥 인권을 날로 먹었다. 내부의 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언론들을 보자. 저들은 현재의 시대인식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것을 저들도 알 고는 있을 것이다. 다만 먹고살기 위해 그냥 받아쓰기를 한다. 물론 그것이 옳지 않음 도 안다. 그 기원을 따라가면 일제시대와 연결돼있다. 저렇게 시대인식을 못하는 사람 은 시대인식을 못 하게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 구조의 중심엔 언론이 있다. 시 대흐름을 못따라가는 윗사람은 결국 희생양. 일제시대의 가치관으로 무장한 언론의...
현재 우리사회는 원칙을 세워간다고 본다. 원칙은 상황이 변해도 일관되게 지켜야하는 규칙이나 법칙이다. 즉 일관성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국민을 폭도로 몰고 죽 음으로 내몰았다. 단지 정권만 바뀌었을 뿐인데. 저들은 일관성이란 원칙을 버리고 돌 변했다. 민중의 지팡이가 몽둥이로 변하는 순간이다. 국민이 주인노릇하는 민주주의란 제도아래에서. 국민이 선거로 권력자를 뽑지 않나? 그런데도 권력자를 주인으로 섬겨? 2010.1.16.밤에
아기가 아장아장 걷다가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걷는다. 다시 넘어진다. 옆에서 이 모 습을 지켜보던 어른이 안타깝다는 생각으로 나선다. 그 아이를 부축한다. 그러자 아기 는 어른의 부축받으며 걷는다. 자, 이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 아기를 도와주는게 과연 옳을까? 그 아기를 도와주는 것이 한편으론 성장을 방해하는 것일 수 있다. 그 아기는 걷다가 쓰러지고 일어섬을 반복하면서 걷는 법을 배운다. 실패를 통해 세상을 배운다.
좀전에 고인이 되신 김대중 전대통령의 영상물을 봤다. 60년대초부터 정치에 나오셔서 우리사회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하신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셨 다. 내가 이 영상을 보면서 위의 아기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우리사회가 그 아기처럼 미숙한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영상물을 보면 김대중님은 국민을 극진히 아끼셨으나 우리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고인이 되신 김대중 전대통령의 생각이 틀렸다.
국민도 1등 국민이 있고 2등 국민이 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도덕적 해이]가 일어난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정치보복]을 안한다고 하셨다. 허나 이것은 정치보복의 차원이 아니다. 건강한 국가를 세우기 위한 구조조정이 이뤄져야만 한다. 이 과정을 생략했으니 노무현 전대통령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악습을 끊는 행동이다. 국민이 주인노릇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기초작업이고. 2010.1.15.밤에
작년에 동영상을 배우면서 뒤늦게 깨달은 내용입니다. 강사님의 말씀과 [시나리오]책 등을 보니 결국은 시나리오였습니다. 완성도 높은 동영상은 뛰어난 이야기의 구성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동영상은 영상으로 설명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는데 그동안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제가 그동안 동영상에 대해서 어려워했던 것은 다른 뭔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없었습니다. 인생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면서 이야기를 만듭니다. 영상은 이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 중에 한가지인 것이지요. 영상은 이야기를 넘어설 수도 없으며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헌데 이 이야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은 우리에게 갈등이라는 스트레스를 줍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같은 영상들도 이러한 갈등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결국은 갈등이 반복되고 이는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건 50%뿐이죠.)
어쨌거나 먼저 이 길로 들어선 당사자로서 뒤따라 올 후임자들을 위해 기록을 남깁니다. 이야기보다는 동영상에 먼저 관심가진 저의 실수를 거울삼아 이야기에 먼저 관심가지세요. 파랑새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있습니다. 영상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영상을 끌고가는 것입니다. 영상이 주인인 듯싶으나 사실은 이야기가 주인공인 셈이죠. 2010.1.13.밤에
김용철변호사를 기억하십니까? 그분이 삼성을 고발한 시점이 2007년 11월쯤이다. 그리 고나서 삼성이 변한 것이 있는가? 그 뒤로 이용철변호사란 분도 삼성의 로비를 고발하 셨다. 그럼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오늘날 국민들이 삼성을 싫어하는덴 이러한 내막도 존재한다. 당장 먹고살자니 일자리는 필요하다. 허나 그러자면 도덕적 타락을 조금 감 수해야 한다. 개발시대의 대기업중심에서 이젠 중소기업으로 전환할 때가 아닌가 싶다. 2010.1.6.밤에
죄가 되고 안되고의 판단을 스스로가 내린다? 이 자체로 객관성을 상실했다. 오늘올라 온 기사들이다. 검찰을 대하는 국민들의 반응도 상당히 적대적이다. 헌데 여기서 생각 해볼 문제가 있다. 검찰은 국민의 지팡이도 되지만, 몽둥이도 된다는 것. 어떻게 사용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머슴을 주인으로 섬기던 검찰이다. 최근 10년동안 조용 했었다. 이것이 실수였다. 과거에 대한 단죄가 없으니 머슴을 계속해 주인대접하는 것. 2010.1.6.밤에
오늘 터미널에서 있었던 일이다. 버스 한대가 터미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한 아줌마 가 그 버스를 타려고 손을 흔든다. 그러자 버스는 그냥 출발한다. 그 아줌마가 흥분한 상태로 욕을 한다. [싸가지 없는 새끼]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저씨가 한마디한다. [싸가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맞는 것]이라고. 간발의 차이로 그 아줌마는 버스를 놓쳤다. 자, 이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아줌마와 아저씨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자.
아줌마의 입장. 손을 흔들어 탈려는 의사를 표현했다면 버스가 정차해야 한다. 그것이 그 아줌마의 입장에선 [싸가지 있는 행동]이다. 반면 아저씨의 입장이 돼보자. 버스에 는 배차시간이란 게 있다. 그 시간은 버스에 탄 승객들과 약속된 시간이다. 즉 한사람 의 편리를 위해서 다수의 시간을 나누는 게 옳으냐는 얘기. 단순히보면 개인의 일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의미를 넓게 확장하면 우리사회의 모습과 일치한다. 진보와 보수.
사실 진보와 보수는 익숙함과 낯설음의 충돌이라고 본다. 어느쪽에서 보든지 그들만의 논리가 있고 이유가 있다. 버스를 놓친 아줌마는 잠깐동안 문열어주고 금방 타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 아줌마에겐 10초에 불과하지만 버스에 탄 승객들에겐 6분의 시간낭비가 된다. 만원이라 40여명이 넘게 타고 있었다. 이 상황 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 보인다. 기나긴 독재로 우리사회가 보수화 됐다. 2010.1.5일 밤에